인공지능시대에 영어책 한 권 완독해야 하는 이유

인공지능을 장착한 구글 번역과 네이버 파파고의 성능을 보면 굳이 외국인과 뒤섞여 살 게 아니라면 영어 공부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 규칙까지 학습해 번역해주니 단어와 구문 단위로 끊어짐이 없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이제 영어공부는 필요 없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미국, 프랑스 등 10여 개국에 소설이 번역 출간 된 소설가 김영하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시기를.

“가끔 해외에서 번역된 제 책을 보게 될 때가 있어요.
마치 20년 전 여자 친구가 제 아이라면서 처음 본 아이를 데리고 나타날 때의 기분 같아요.

반갑기는 한데, 제 아이인지 확실치는 않고, 보면 또 제 얼굴이 있거든요. 반갑지만 당혹스러운데 어쨌든 그 앞에 서 있어야 해요.
사람들이 질문을 하면 대답을 해야 하고요.” 
– 김영하 에세이 <말하다>

“이런 말이 있어요. ‘번역된 작품의 작가는 자기 작품 앞을 지키는 눈먼 문지기다.’ 지키려고 하지만 무엇을 지켜야 할지 모르는 채 서 있는 문지기인 셈이죠.”

소설가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이 번역한 글, 인공지능이 통역한 말 앞에서 앞으로 우리는 눈먼 문지기가 될 수 있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흘려보내야 할지 모르는 문지기.

그래서 인공지능시대 영어공부는 오히려 더 어려워졌는지 모른다. 아웃소싱 할 수 없는 언어의 본질적 능력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표현이 아니라 맥락과 뉘앙스, 그냥 전달이 아닌 의도와 교감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 능력은 생각의 능력이고 생각의 질까지 인공지능에 맡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공지능시대에는 
영어를 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격차가 아니라 영어를 제대로 하는 사람과 제대로 못하는 사람의 격차이다.

새로운 영어 격차의 시대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시대
영어공부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어쩌면 고전적인 하루키의 영어공부 방법이 인공지능시대 정답인지 모른다.

하루키는 가디언 같은 정통매체와 신나고, 편안하고, 재미있게 인터뷰한다.
스탠퍼드대 객원교수로 영어로 강의도 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도입부를 영어로 쓰고 일어로 옮겼다.

그는 피츠제럴드. 커포티 등 미국 작가의 소설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의 영어 비결은
중학교 때부터
폭식하듯 읽은
영어 소설.

“나는 고등하교 중반쯤부터 영어 소설을 원문으로 읽었습니다. 딱히 영어가 특기였던 것은 아니지만 꼭 원어로 소설을 읽고 싶어서 헌책방에서 영어 페이퍼백을 한 무더기 사다가 와작와작 난폭하게 읽어댔습니다.”
-하루키,<직업으로서의 소설가>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익숙해졌다’고 할까, 그다지 저항감 없이 읽어냈습니다. 대부분이 화려한 표지의 미스터리나 SF같은 것이라 그리 어려운 영어가 아닙니다. 제임스 조이스라든가 헨리 제임스라든가, 그런 까다로운 책은 고등학생으로서는 도저히 감당을 못하지요.”

“그런데도 왜 내 영어 성적은 여전히 별로 좋지 않은가.

내 나름대로 납득한 것은 일본 고등학교에서의 영어 수업은 살아 있는 실제적인 영어를 습득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입시 영어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따는 것, 그것을 거의 유일한 목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무엇 때문에 영어를 배우려고 하는가라는 목적의식입니다. 그것이 애매하면 공부는 그냥 ‘고역’이 되어버립니다. 내 경우는 목적이 아주 뚜렷했습니다.
아무튼 영어로 소설을 읽고 싶다.
우선은 그것뿐입니다.”

읽고 싶어 읽고
읽다보니 익숙해지는 과정,

기계번역과 기계통역 앞에서 눈먼 문지기가 되지 않는 정답일지 모른다.

이런 익숙해짐이 보낼 것과 남길 것의 혜안을 줄 수 있으니 말이다.

겉핧기식의 영어가 아닌 숙성된 영어 학습법을 익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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